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이 사고 8일 후에 [[1993년 한국시리즈]]가 열렸지만 [[이태원 압사 사고|29년 후]]처럼 정부 차원에서 [[국가애도기간]]을 선포하지는 않았다.[* 훗날 일어난 [[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]] 직후에도 공식적으로는 선포하지 않았다.] * [[SBS]] 예능 프로 '[[짝(SBS)|짝]]' 2013년 5월 16일 방영분에 서해훼리호 침몰로 부모님을 잃은 남자(성악가 남자 1호)가 출연하였다. * 위도 파장금항에서 면 소재지로 가는 길 중간 쯤에 서해훼리호 사고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. * 흔히 '''[[사고 공화국]]'''이라고 부르던 [[김영삼]] 대통령 재임 시절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 사고 중의 하나이다. 그리고 1995년까지 매년 최소 1번 이상씩 참사가 터졌다.[* 1994년 [[성수대교 붕괴 사고]], 1995년 [[삼풍백화점 붕괴 사고]], [[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|상인동 가스폭발 사고]]] * 참사 10주년을 맞이한 2003년에 위도는 [[부안사태|핵폐기장 유치 갈등]]으로 인해 [[https://m.hankookilbo.com/News/Read/200310110087324400|지역 민심이 뒤숭숭했다.]] * 사고의 교훈을 잊은 듯 '''[[2014년|21년 후]]에는 [[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|더 큰 규모의 배 침몰 사고]]가 발생했다.'''[* 세월호 사건은 국가가 늑장 대응을 해서 벌어진 비극인 데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불특정 다수인 데 비해 세월호는 특정 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까지 희생되었다.] [[안전불감증]]이 없어지기는커녕 비록 인재였지만 끝까지 승객 대피를 위해 책임을 지고 [[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|선박과 운명을 같이 한 서해훼리호 선장 및 선원들과는 달리]] [[직무유기|그 책임마저도 지지 않았다.]] 또한 한국 언론의 악질성도 몇 술은 더 뜨는 수준이었다.[* 90년대 초반에는 [[PC통신]] 이용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데다 속도도 느렸기에 그나마 기사 낚시질은 잘 벌어지지 않았다. 또한 같은 이유로 인해 기사의 주 보도 방법이 신문이나 방송국들의 경우 뉴스밖에 없었고 특히 신문은 일단 팔려나가면 일단 그날은 오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고 그 다음날 신문이 돼야만 정정 보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한 번이라도 사실 확인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. 하지만 [[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|세월호 참사]] 때는 네트워크가 발전된 영향 때문인지 기사 낚시질 같은 트래픽 장사질+상업, 선정적인 보도 행태+침소봉대적인 보도 행태+기사 베껴 쓰기+제대로 확인 안 하고 보도, 인터뷰하기+이걸 다른 방송, 기사랑 착각하여 확인 안하고 2차 오보 양산하기 등등의 종합 선물 세트 현상이 벌어졌다.] 심지어 2017년 3월 [[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]]에서도 무능력한 대응이 재현되었다. * SBS [[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]] 2021년 11월 4일 방영분인 3화 '그 배를 탄 사람들 - 1993 서해 훼리호'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. 방송에서도 최후반부에 기존에 일어났던 선박 사고들을 언급했고 가장 최근에 발생한 해양 참사인 세월호 참사와의 유사점을 지적했다. 이 에피소드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생존자 중 한 분이 SBS 달리 채널에 업로드된 에피소드 편집본 영상에 직접 댓글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. [youtube(5rWFC5JIoRg)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